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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펌] 척 노리스

2006.03.20 16:46

오리맛사탕 조회 수:1080 추천:55

척 노리스 Chuck Norris


1990년대에 반담과 스티븐 시갈이 있었다면, 1980년대에는 이 털보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1939년생으로 이제 환갑도 넘은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이 배우는 1970년대 이미 스크린 위에서 이소룡과 대결을 펼친 바 있는 ‘진짜 무술인 배우’입니다. 1980년대가 되자마자, 국내 개봉되었던 <옥타곤> 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닌자로 출연했었죠. 맨손으로 악당들을 때려잡던 척 노리스는 곧이어 총을 들고는 베트콩으로부터 아랍 테러리스트들이나 부정한 경찰까지 가리지 않고 처절한 살육전을 벌입니다. 그가 80년대에 출연한 영화의 대부분은 스토리라인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오리지널 액션영화’들입니다. 사실 B-Movie의 긍정적인 측면을 거세하고, C-Movie 라는 용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바로 적용될 수 있는 전형적인 영화들입니다. 매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어보이는 이 털보 아저씨는 왜 그렇게 각광받은거죠?

척 노리스는 한국출신?

1960년으로 돌아갑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들어가 비행훈련을 받던 척 노리스는 우리나라의 오산으로 발령을 받습니다. 전투라고는 없는 주둔지에서의 지루한 나날을 에전부터 관심있었던 ‘유도’를 배우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던 그는 어느날, 어깨 부상으로 유도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워낙에 좋아하던 척은 서쪽을 바라보고 향수를 달래기라도 할 듯 근처의 작은 언덕에 올라갑니다. 거기서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을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몇 명의 한국 사람들이 점프를 하고 킥을 해대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태권도였습니다. 태권도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는 곧바로 부대로 돌아와 유도 코치에게 자신이 본 믿을 수 없는 기민한 동작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제서야 그는 그것이 ‘태권도’라는 명칭을 가진 무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척 노리스는 다시 그 언덕으로 달려가 신재철 사범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것을 애청합니다. 그는 한국 주둔 2년여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태권도를 연마, 결국 검은띠를 따내고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제대합니다. 1964년까지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무술 사범으로 마치 반칙왕처럼 살던 그는 무술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가라데와 쿵푸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무술이었지만 태권도를 배운 선수는 드물었습니다. 기민한 그의 발차기는 세계의 무림을 뒤흔들었고 1969년엔 메이저 대회 3관왕으로 ‘블랙 벨트’ 잡지에서 ‘올해의 파이터’로 선정되기도 합니다.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는 제왕 척 노리스는 영화계로 눈을 돌리고 1972년, <맹룡과강>으로 영화계에 뛰어듭니다.


척 노리스, 2단옆차기와 양손 우제 자동소총으로 영화계를 평정하려고 노력하다.

<용쟁호투>와 <사망유희>까지 이소룡의 영화에 파이터로 출연한 그는 1978년, 전설적인 B무비 <좋은 녀석들은 검은 옷을 입는다 Good Guys Wear Black>로 개인적인 인기를 얻어내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연의 <코만도>까지 수많은 액션물이 채택한 ‘전직 특수부대 요원이 자신의 전우들의 미스테리어스한 죽음에 휘말린다.’는 스토리라인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옥타곤>에서는 자신의 주연작으로 ‘고향’인 한국 진출에 성공하고, <고독한 늑대 Lone Wolf McQuade>로는 텍사스 레인저 이미지를 굳히는 등 세미 히트작에 출연하던 그는 결국 ‘람보’의 B무비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싱 인 액션 Missing in Action> 으로 스타 반열에 오르고, 어이없게도 속편까지 만들어지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사일런스 Code of Silence>가 국내 개봉할 때 즈음, 그는 완벽한 스타가 되어 있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각본까지 쓴 <매트 한터 Invasion U.S.A.>는 ‘과도한 폭력으로 수입을 금지’하는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만 몇 년 후 개봉되었을 때 대체 과도한 폭력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역시 불러일으켰습니다.

척 노리스가 소매를 뜯어버린 청자켓과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양손에 우제 자동소총을 들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장면 하나면 ‘시원한 액션’은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척 노리스 경력의 절정은 바로 전설적인 제작자 메나헴 골란이 직접 감독한 <델타포스 the  Delta Force> 였습니다. 최소한의 제작비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는 액션물을 주로 제작했던 80년대 가장 엽기적인 제작사 캐논그룹에서 막대한 제작비인 300만달러 (라고 해봐야 다른 블록버스터의 반도 안되는 금액이었지만)를 들여 무려 1천 700만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린 이 영화는 캐논그룹 사상 최고의 블록버스터였습니다.

척 노리스를 이야기할 때 캐논그룹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MGM의 동업자중 하나였던 메나햄 골란이 만들었던 이 영화사는 스웨덴 에로물로부터 홍콩 액션물까지 ‘B급’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영화들을 수입했고, 척 노리스 주연의 일련의 액션물들을 생산했으며, 수퍼맨 ‘4편’, 텍사스 체인톱 대학살의 ‘2편’ 등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속편들을 만들을 뿐만 아니라 <람바다> 열풍까지 만들어냈고, ‘저비용 고수익’의 수익모델로 80년대 영화사들의 귀감이 되어 타임지에 등장하는 등의 활약을 벌이던 중 ‘쓰레기 영화만 양산한다’는 비난에 ‘다 죽어봐라’ 하는 심정으로 장 뤽 고다르가 감독과 주연을 맡고, 우디 알렌에 레오 까략스까지 등장하는 <리어왕>을 제작하여 정문 앞에 대문짝보다 더 큰 포스터를 붙여놓고 ‘우리, 이런 영화도 만들었다구.’ 하는 시위를 벌였던 그야말로 엽기적인 영화사입니다. 캐논그룹의 몰락과 함께 척 노리스는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쌓아왔던 그의 ‘텍사스 보안관’ 이미지를 이용하여 국내에서도 방영했던 TV시리즈 <텍사스 레인저 Walker, Texas Ranger>에서 무려 8년동안 주연을 맡는 발군의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미 육군 교전수칙과도 하등의 관계가 없는 특수부대 요원, 닌자, 이소룡과의 대결, 도시를 쓸어버리는 B급 람보였던 척 노리스의 액션물. 80년대를 회상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B-Movie 스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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